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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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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역사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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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몽촌토성 (사적 제297호)
백제 한성시대 왕성으로 남한산에서 이어지는 구릉성 산지 끝자락에 위치한다. 성벽 둘레는 2.383m이며, 높이는 현재 6∼40m로 지점에 따라 다르다. 성벽 바깥 쪽에 기둥 흔적이 있으며, 동남쪽에서 흘러온 성내천이 동·북·서쪽 성벽을 감싸고 돌아 해자 역할을 한다. 이 토축성에는 왕궁·관청·왕실 직속 군대 등이 존재하였고, 비상시 피난처의 기능도 하였다.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 집자리와 건물지, 저장구덩이, 도로, 연못 등이 확인되었다. 수천 점의 토기와 동물뼈로 만든 갑옷을 비롯하여 중국제 청자, 일본산 스에키가 출토되어 백제의 적극적인 국제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 (사적 제267호)
기원전 5,000∼4,000년 경 한강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석기 시대 마을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40기 이상의 집자리터가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주거 유적 중 제일 큰 규모이다. 빗살무늬 토기와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어로, 채집 활동과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유적도 인접해 있으며,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들도 발견되어 신석기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서울 방이동 고분군 (사적 제270호)
방이동 구릉지대에 위치한 백제 한성시대 무덤으로 총 8기가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에 1·4·5·6호분, 2017년에 3호분을 발굴조사 하였다. 돌로 방을 만든 뒤 통로인 널길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이며, 출토유물로는 철제편과 흙으로 만든 굽이 달린 접시와 뚜껑 등이 있다. 6호분에서 확인된 굽이 달린 접시의 경우 전형적인 신라토기의 형식으로 한강유역이 신라영토로 되었을 때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으나, 가깝게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과 함께 백제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제11호)
백제 한성시대 왕성으로 지금은 약 2.7km 가량만 남아 있으나, 원래 전체 둘레 3.7km에 달하는 규모의 토성이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으로 마치 옛날 나룻배 모양과 같다. 성벽은 고운모래를 한 층씩 다져 쌓았으며, 이는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 적합한 방법이다. 성벽의 아랫면 너비는 43m, 원래 높이는 약 12m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고급 유물이 출토되어 널리 알려졌으며, 1997년 토성 안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유물이 많이 발견된 뒤 발굴조사하기 시작했다. 지하 4m 깊이에서 백제왕궁의 일부로 보이는 각종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등이 발견되었으며, 각종 토기, 벽돌, 기와, 토관, 장신구 등 귀중한 유물이 수십만 점이 출토되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사적 제243호)
백제 한성시대 왕과 왕족·귀족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유적이다. 1917년경에는 큰 무덤 290여 기가 있었으나, 1970-80년대 도시개발로 모두 파괴·훼손되고 지금은 8기 정도만 남아있다. 백제의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돌 덮은 흙무지무덤, 움무덤, 독무덤 등 여러 형태의 백제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무덤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채워 만든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달리, 쌓아올린 흙 위에 다시 돌을 올려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74년 잠실 일대의 개발을 계기로 1987년까지 수차례 진행되었으며, 2015년부터는 백제 고분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고 보존·정비 방안을 위한 발굴을 시행 중이다. 각종 토기, 기와, 금장신구, 유리구슬, 다량의 동물뼈, 철모 등이 확인되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사적 제455호)
중랑천과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아차산 일대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 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규모가 작은 구의동 보루에는 10여 명, 홍련봉 1보루에는 50명,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 보루에는 100여 명의 고구려군이 생활하였다. 특히 구의동 보루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 가운데 최남단 보루로서, 한강을 건너거나 백제·신라의 길목을 차단하는 최전방 부대의 기지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보루에서 무기와 함께 농기구와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배식용 토기에는 개인 식기를 구별하기 위한 여러가지 부호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아차산성 (사적 제234호)
삼국시대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약 1,125m,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있고,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보호하는 옹성 겸 망루터가 남아있다. 일명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으로도 불린다. 1997년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00여 점의 토기와 30여 점의 철기, 100여 점의 무기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주로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이 출토되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성 연대는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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