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전시실은 백제가 지금의 서울에서 건국하고 성장․발전하던 한성도읍기 493년을 다룬다. 백제의 중앙문화뿐 아니라 지방문화 및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의 관련 문화까지도 포함하였다. 따라서 다른 전시실과 달리 주제별로 전시하였다.
백제의 건국
졸본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 일행은 부아악(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핀 뒤 한강 남쪽의 위례(지금의 풍납토성 일대)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 때가 기원전 18년,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이다.
더 큰 나라로
백제는 3세기에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고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북으로 대동강, 남으로 땅끝까지 영토를 넓힌 백제는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 백제의 도읍은 한성이었다.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합친 이름이다. 풍납토성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제품, 은제품, 청자 등 고급품이 많지만, 풍납토성이 왕도였음을 가장 잘 증명하는 유물은 흙으로 빚은 토관이다. 토관은 하수관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부터 적어도 1600년 전, 4~5세기에 풍납토성 안에서 하수관을 만들어 썼음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당시의 세계 경제․기술 수준으로 보아 하수관을 사용할 정도로 위생적이며 격조 높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 기술자를 동원해야 했다. 토관은 서로 연결해 쓰는 시설물이므로 규격이 같도록 일정한 틀에 맞춰 고운 흙으로 수천개의 토관을 빚었을 것이다. 토관의 방수 효과를 높이려면 그늘에서 천천히 말린 뒤 불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야 한다. 그를 위해 나무 수천그루를 잘라 말려서 가마 장작으로 써야만 했다. 땅을 파고 토관을 줄지어 묻는 작업에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1개의 토관 유물은 백제 때 상․하수관을 구성했을 토관 1천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수십명 혹은 수백명의 기술자를 장기간 부릴 수 있는 기술력, 경제력, 권력 등을 상징한다. 토관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저택과 정연한 도시구획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과 문화수준도 나타낸다. 4~5세기 무렵 백제에서 이처럼 다양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백제왕과 그 주변 인물들뿐이었을 것이다.
백제사람의 삶
백제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옛 집터를 통해 백제사람의 일상을 복원하였다. 백제사람들은 생선을 많이 먹었다. 유적에서 상어뼈도 발견되었다. 석촌동, 가락동에는 백제의 왕실묘역이 있었다. 백제사람의 무덤은 매우 다양해서 계층과 지역에 따라 각각 달랐다.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글로벌백제
백제는 서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하고 왜에 문물을 전파하였다. 4~5세기에 백제는 고구려· 가야·신라·탐라는 물론 중국의 남·북조, 왜(倭) 등 바다 건너의 많은 나라들과 교류하고 경쟁하였는데, 복원 제작한 실물 크기의 백제 배를 통해 글로벌 백제의 해양성, 진취성, 개방성,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6세기에 이역만리 중국땅을 밟은 단정한 옷차림의 백제사신 그림 [양직공도]를 통해 백제사람의 문화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