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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합뉴스 보도자료] 2021.07.06. 무령왕릉 발굴 50년…새 보고서에서 찾은 5가지 이야기
등록일 2021-07-06 조회 278
담당자 전미정 담당부서 백제학연구소
연락처 02-2152-5954 이메일 baekje@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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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방 앞 벽돌·석수와 지석·옥 유물 등 분석 결과

무령왕릉 북벽
무령왕릉 북벽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71년 7월 8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주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가 묻힌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명확하게 드러난 유일한 고분이다. 벽돌(전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무덤 내부에서는 백제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한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이후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 조사로 이어졌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등에 따르면 무령왕릉은 그해 7월 5일 백제 웅진도읍기(475∼538)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송산리 고분군에서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정부는 새로운 백제 왕릉급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에 조사단을 허겁지겁 꾸렸고, 전격적으로 발굴조사를 결정했다.

7월 7일 폭우가 내리자 조사단은 일단 철수했고, 이튿날 아침 일찍 발굴을 재개했다. 이날 오후 4시 15분께 무덤문을 연 조사단은 곧 '무령왕릉'임을 발표했고, 기자와 주민에 둘러싸인 채 속전속결로 발굴을 진행해 7월 9일 오전 8시께 모든 유물을 수습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도 없이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것이다.

이로 인해 무령왕릉 발굴은 오랫동안 '졸속 작업'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1973년에 나온 발굴조사 보고서도 출토 유물 4천600여 점 가운데 2천600여 점만 언급됐고, 실측 도면도 일부만 수록돼 후속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내용이 부실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관하는 국립공주박물관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2009년 '무령왕릉 신(新)보고서'를 처음 간행한 뒤 지금까지 모두 6권을 펴냈고, 2023년까지 3권을 더 발간할 예정이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조사 과정과 유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신보고서에서 다섯 가지 이야기를 뽑아 소개한다.

무령왕릉 발굴 모습
무령왕릉 발굴 모습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덤방을 막고 있던 벽돌의 특징은 무엇일까

무령왕릉은 백제의 전형적 무덤 양식과 달리 벽돌로 지었고, 무덤 내부와 바깥을 가르는 입구에도 벽돌을 쌓아 올렸다. 조사단이 무덤방 벽돌을 빼냈을 때 몇 명은 무덤 속으로부터 하얀 김이 빠져나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무덤방 폐쇄에 사용된 벽돌은 614점이 있다. 형태를 알 수 있는 유물이 366점이고, 나머지는 일부만 남았다. 모양은 정사각형·직사각형·사다리꼴·삼각형 등 다양하고, 문양도 다채롭다. '대방'(大方) 혹은 '중방'(中方)이라는 글씨가 있는 벽돌도 존재한다.

또 다른 특징은 떨어져 나간 면에 석회가 발라져 있고, 형태가 온전해도 부풀거나 균열이 심한 벽돌이 많다는 점이다.

무령왕릉 무덤방 내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형식의 벽돌과 무령왕 사망 시점인 523년보다 이른 512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 '사 임진년작'(士壬辰年作)이 새겨진 벽돌도 확인됐다.

보고서는 "무덤방 벽돌은 별도로 제작한 물품이 아니라 무령왕릉 무덤방이나 다른 고분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활용한 듯하다"며 "형태가 완전하지 않은 실패작도 쓰였다"고 분석했다.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릉 지킨 돌짐승과 무덤 주인 알려준 지석 성분은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12건이다. 귀걸이나 왕관 꾸미개 같은 금붙이가 많은데, 석수(石獸)와 지석(誌石)으로 명명된 문화재 두 점은 재질이 돌이다.

석수는 무령왕릉을 지키던 짐승 조각으로, '진묘수'(鎭墓獸)라고도 한다. 높이 30.8㎝·길이 49㎝·너비 22㎝이며, 입이 뭉뚝하고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 철제 뿔을 달았다. 조사단은 무덤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석수를 '그로테스크한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석수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지석은 두 장으로 구성되며, 앞뒤에 각각 내용이 있다. 무령왕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라는 인명과 사망 시점이 기록됐고, 십이간지 방위표도 있다.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왕비 지석에는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계약서에 해당하는 매지권(買地券)이 새겨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석수와 지석 재질은 화성암의 일종인 각섬석암으로 동일하다. 화성암은 마그마가 냉각·응고하면서 만들어진 돌이다. 표면은 전반적으로 녹회색을 띠지만,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드러난 부분은 어두운 회색이나 녹색이다.

각섬석암은 공주 일대에는 산지가 없고, 전북 장수에서 많이 나온다. 흔히 '곱돌'이라고 하는 돌이 각섬석암이다. 장수 인근인 남원 아영면에서도 각섬석암이 산출된다. 보고서는 공주에서 100㎞ 이상 떨어진 장수나 남원에서 돌을 조달해 석수와 지석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짚었다.

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리
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3만 점 넘게 수습한 옥 유물의 성격은 무엇일까

무령왕릉에서는 자그마한 알갱이 같은 구슬인 옥 유물이 3만1천210점이나 발견됐다. 그중 유리옥이 3만741점으로 전체 수량의 98.5%를 차지한다.

색상은 주황색이 8천338점으로 가장 많다. 이어 녹색 7천929점, 감색 6천425점, 짙은 푸른색 3천762점 순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노란색이나 보라색 옥도 있다.

전체 지름은 0.06∼0.95㎝이고, 단면 높이는 0.06∼0.7㎝이다. 구멍 지름은 0.04∼0.7㎝이고, 평균값은 0.14㎝이다. 지름이 0.6㎝ 이상인 대형 유리옥은 대부분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이다.

보고서는 이렇게 색상과 형태가 제각각인 옥 유물의 용도가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금동신발과 같은 금속 공예품의 장식, 목걸이, 가슴걸이, 팔찌, 무덤 내부 장식에 활용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일부 유리옥의 화학 성분을 분석하면 제작지가 인도 남부, 태국, 중국 남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유리옥이 백제와 동남아시아, 중국의 교류 증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 앞면(왼쪽)과 뒷면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 앞면(왼쪽)과 뒷면

[신보고서에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의 큰칼과 손칼에서 발견된 적색 안료 정체는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 허리 부근에서 길이 90㎝인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 1점이 출토됐고, 금·은장식 손칼 4점도 발견됐다. 손칼은 왕 허리 근처에서 1점, 왕비 쪽에서 3점이 나왔다.

보고서는 학계에서 고리자루큰칼 제작지를 중국 남조와 백제로 보는 시각이 대립했는데, 천안 용원리나 공주 수촌리에서 무늬가 비슷한 유물이 발견됐고 세부 가공 방법도 무령왕릉의 다른 유물과 흡사해 백제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무령왕 관련 유물인 큰칼과 손칼 1점에서는 적색 안료 흔적이 발견됐다. 이 안료는 왕비 유물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천연 광물인 진사(辰砂) 혹은 주사(朱砂)로 추정됐다.

보고서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 많은 백제계 유물이 발견된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 금귀걸이에서도 적색 안료가 확인된 바 있다"며 "적색 안료는 백제와 연관된 중요 유적의 일부 금속품에서 공통으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어 "적색 안료는 공예품을 장식하는 효과는 물론 주술적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무령왕 부부 목관
무령왕 부부 목관

뚜껑 나무판이 5개인 오른쪽이 무령왕 목관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과 왕비 목관은 어떻게 다를까

무령왕릉에는 525년 먼저 무령왕 시신을 안치하고, 4년 뒤인 529년 왕비 시신을 뒀다. 왕과 왕비 목관 재료는 일본에서 자생하는 나무인 금송(金松)이며, 표면 전체에 옻칠을 했다.

백제에서 금송으로 관을 만든 사례는 적지 않다.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잠든 것으로 짐작되는 익산 쌍릉 대왕릉 목관과 부여의 왕릉급 무덤인 능산리고분군 동하총(東下塚) 목관도 모두 재료가 금송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무령왕 사망 시점인 6세기 초 서일본의 대형 고분에서는 금송으로 만든 목관이 집중적으로 사용됐다"며 "금송 목관은 당시 백제가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왕과 왕비 목관은 규모와 형태, 제작 방식이 비슷하다. 다만 왕 목관은 뚜껑을 나무판 5개로 제작했는데, 왕비 목관은 3개로 만들었다.

또 왕비 목관은 왕 목관과 달리 마구리 장식이 없다. 마구리는 길쭉한 상자나 토막의 양쪽 머리 면을 뜻한다. 목관에 사용한 관고리와 관못 제작 방법도 달랐다. 전반적으로는 왕 목관이 왕비 목관보다 화려한 느낌을 준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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